라이프, 여행

내가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 해중왕릉 경주 "문무대왕릉"

Tralala 2024. 2. 2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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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문무대왕의 해중왕릉(海中王陵), 대왕암, "문무대왕릉"

 
# 프롤로그 
 
커튼 사이로 날이 밝아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출을 방 안에서 감상하고자 커튼을 열었는데, 날은 밝아오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일출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쉽습니다. 호텔 룸에서 일출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오는 게 아닌데.. 아마도 한번 더 내려오라는 문무왕의 왕비, 자의왕후(慈儀王后)께서 일부러 만드신 상황일 것이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고급호텔에서의 침구류는 역시 고급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면 침대보에 면 이불까지, 게다가 킹사이즈(?)의 침대라 옆에서 뒤척여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매트리스 2개를 붙여놓은 듯싶습니다.
 
2박 3일간의 2023년도 마지막 여행이 금방 지나가 버렸습니다. 참 많은 여행지를 다니긴 했지만 어디를 다녔었는지 억지로 기억을 해야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글을 남기는구나 싶습니다. 
 
 
호텔뷔페에서의 화려한(?) 조식 
 
웬만하면 호텔 조식은 문 열자마자 첫 손님으로 들어가는데, 전날 무리를 했는지 조금 늦잠을 자게 되어 조식 시작 시간보다 약 40분 늦게 식당으로 들어가니 이미 몇몇 투숙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부랴부랴 접시를 들고 이것저것 열심히 담아 봅니다. 그런데 호텔 조식뷔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을까요? 조금은 일반적인 식단에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뷔페식단도 평가할 정도로 입이 고급으로 변해버렸습니다 ㅎㅎㅎ.
 
식사를 마친 후 체크아웃 시간이 11시까지여서 여유롭게 바다를 구경하러 나왔습니다. 바다는 호텔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몽돌해변' 입구

 
바다를 들어가는 입구가 이쁩니다. 입구 양 옆으로 주차장이 있으나 30~40대(?) 정도만 주차할 수 있을 것 같아 여름에는 이곳 주차장을 포기해야 할 듯싶습니다. 

 
숙소 호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봅니다.

 
제가 봐서는 사진이 잘 찍힌 것 같지만 집사람은 호응을 안 해줍니다.

 
몽돌의 반짝임이 바다에 비치는 물비늘과 잘 어우러집니다.  

 
몽돌을 가까이서 찍어 봤습니다. 대부분 엄지손톱 크기의 작은 돌들이며, 제법 큰 돌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모래도 있긴하지만 몽돌의 작은 버젼입니다.
 
몽돌이 모래보다 좋은 이유는, 모래처럼 몸에 들러붙지 않는다는 겁니다. 백사장에서 모래찜질등을 하게 되면 아무리 모래를 말린다 해도 바다의 소금기와 함께 모래가 몸에 들러붙어 샤워를 하지 않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데, 몽돌은 손으로 몸에 붙은 몽돌을 쓸어내리면 후드득 다 떨어지므로 몽돌해변에서의 물놀이가 좋습니다.

몽돌모래

 

물론, 몽돌의 크기가 클 경우, 예를 들어 인천의 덕적도 몽돌해변은 몽돌의 크기가 달걀만 해서 걸어 다니면 저절로 발바닥 지압이 됩니다. 따라서 이곳의 몽돌해변은 여름에 다시 와 보고 싶은 곳입니다. 

숙소에서 바라본 바다전경

 
1시간여 몽돌 바닷가를 산책 후 숙소로 돌아와 창밖을 바라보니 새벽 동틀 때의 구름이 원망스럽습니다.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일출을 보지 못하다니, 그리고 해가 다 떠오르니 구름이 없어지다니, 분합니다. 꽈드득.
 
짐을 챙겨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로 출발을 합니다. '문무대왕릉'입니다. 
 
 
초라한 '문무대왕릉'
 
"내가 죽거든 나를 화장하여 동해에 묻어다오. 그러면 내가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
 
신라 문무대왕이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어 달라한 유언을 따라서 장사한 곳입니다. 현주소로는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30-1번지로 봉길리 해안 20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해중왕릉(海中王陵), 즉, 왕의 무덤이 바닷속에 있다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수중 무덤입니다.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룬 후 681년 음력 7월 1일에 붕어(승하)하셨다고 하며, 붕어(승하) 하기 전에 남긴 말이 "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죽어서까지 통일신라를 왜구의 손에서 지키겠다고 다짐한 문무대왕, (金)이고, 이름은 법민(法敏)입니다. 
 
호텔에서 30여분 운전하여  주차장에 도착하니 뭔가 조금 썰렁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거니와 왕복 2차선 좁은 도로 옆에 식당과 허름한 집들만 있을 뿐 유적지 같지가 않습니다. 안내표지판만 빼고는...

 
좁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안내판에 따라 '문무대왕릉'으로 걸어갑니다. 멀리서도 보이긴 하지만 불과 50여 미터를 걸어갔었을 때쯤, 바다 한가운데 '문무대왕릉'이 제일 가까이 보입니다.
 
'아, 저곳에 문무대왕이 묻히셨구나'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문무대왕릉에 유골이나 기타 무덤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하며, 비석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문무대왕릉'
해안가에서 불과 200m 떨어져 있는 '문무대왕릉'
갈매기떼와 비둘기떼

 
분노의 질주 
 
문무대왕 앞 가장 가까운 곳에 갈매기와 비둘기가 떼를 지어 앉아 있습니다. 서로 자리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ㅎㅎ. 
 
파도가 치는 곳까지 걸어가니 왕 밤이 하나 굴러다닙니다. 
 
'엥? 바닷가에 웬 왕 밤?
 
밤을 집어 들어보니 표면이 깨끗하고 번들번들한 게 관광객이 생밤을 먹다가 떨어뜨린 것 같습니다 ㅎㅎ. 밤을 돌 위에 올려놓고 큰 돌로 내리쳐 짜갭니다. 약간 짓이겨진 듯이 짜개진 밤을 비둘기들과 갈매기들 사이에 던져 놓았습니다. 잘들 먹어라. 
 
헉, 그런데, 조금 후 생 왕밤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도로가에 있었던 허름한 집들의 앞면이 보여 무엇을 파나 올라가 봤더니, "무당집"이었습니다. 6~7군데 정도 돼 보입니다. 다시 모래사장 쪽을 바라보니 몇몇 어르신들이 한 사람을 부축이며 '문무대왕릉'을 향해 계속 절을 하고 있고, 그 옆에서는 어르신 한 분이 조그만 제단을 두고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여기서 굿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굿을 하면서 제단에 올렸던 음식물 중 하나인 생밤이 누구의 굿이었든간에 모래사장에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한 집에서 징과 꽹과리를 치며 새로운 굿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냐~~?'
 
하~,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경주의 모든 릉은 출입통제 뿐만이 아니라 주변경관을 해치는 모든 건축물들을 없애버렸고, 심지어 수원 화성의 '융건릉' 또한 정조대왕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몇 년 전 융건릉을 재 정비하여 웅장한 유적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동해를 통해 들어오는 왜구를 죽어서도 막겠다고 하신 분의 릉을 2023년도 12월까지도 이렇게 엉망인 채로 관리하고 있다니 기가 막힙니다. 
 
게다가 왕릉 앞에서 굿이라니!!! 굿을 통해 도움을 받으셨던 분들은 감사해하시겠지만, 이렇게 관리해서는 안됩니다. 꼭 개선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2024년도가 '청룡의 해'이다 보니 '문무대왕릉'에서의 굿판이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ㅠㅠ.
 
역사를 교과서로만 배워서는 안 됩니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우리나라의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더 초라한 '문무대왕릉'
 
어제는 문무대왕의 왕비인 '자의왕후'가 묻혀있다고 설화로 알려져 있는 '대왕암'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문무대왕릉'을 방문한 것인데, 차로 45분, 약 35 Km 떨어져 있습니다. 문무대왕의 왕비는 문무대왕이 681년 음력 7월 1일 붕어한 지 몇 달 만에 김흠돌 세력의 반란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서거하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 분의 붕어, 서거 연도는 681년 동일합니다.

 
'자의왕후'도 왕의 유조(遺詔)에 따라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용이 되겠다'하시며 '대왕암'에 묻히셨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아무튼 두 분의 나라사랑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의왕후가 묻히신 '대왕암'은 대왕암 주변을 잘 정비하여 명승지로 만들어 놨는데, '문무대왕릉'은 이렇게 형편없이 관리하고 있다는게 도대체 말이 되나요? 다시 한번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문무대왕릉 → '대왕암' ← 자의왕후
 
'문무대왕릉'도 다른 말로 '대왕암'이라고 하며, '자의왕후'가 묻히신 곳도 '대왕암'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으나 왜 동일한 지명으로 불리고 있는지 정확히 답변을 해 주는 곳이 없습니다.

단지, 큰 바위에 장사를 지내달라고 해서 경주의 '대왕암', 울산의 '대왕암'이다라는 정도 밖에는 설명이 없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감은사지'
 
'문무대왕릉'에서 불과 1.4 Km, 차로 5분 거리에 '감은사지'가 있어 차로 이동을 합니다. 감은사지 가는 길에 '청룡'을 만납니다. 

등대에 있는 청룡 조형


감은사는 동해에서 신라 수도 경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에 세워진 절입니다. 문무왕 때 창건하였고, 이후 신문왕 2년(686)에 완성하였습니다. 문무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감사함을 표하고자 '감은사'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현재는 삼층석탑 2기와 금당, 강당 등의 건물터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난 것은, 금당 밑에는 배수 시설이 있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문무대왕릉이 바라보이는 용이 나타난 곳, '이견대'
 
감은사지에서 5분 거리에  '이견대'가 있습니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서 나라에 큰 이익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곳이라 합니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이곳과 관련된 설화가 있습니다..

' 만파식적'

'만파식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보기는 했으나 정확히는 알지 못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공부해봅니다.
 
교과서 속 설화, '만파식적' 이야기

감은사를 지으신 통일신라의 왕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이었다. 문무왕은 아시다시피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신 왕이다. 문무왕은 동해바다를 통해 쳐들어오는 왜병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동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감은사지에 절을 지었으나 완공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살아생전에도 문무왕은 늘 이제 갓 통일된 신라의 미래에 대해 근심과 애정이 깊어 숨을 거두기전에 아들 신문왕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나를 화장하여 동해에 묻어다오. 그러면 내가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
돌아가시면서까지 신라에 대한 걱정을 한순간도 놓지 못했던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대로 동해바다에 왕릉을 만들었고 아버지가 못다 지으신 감은사를 완성하고 감은사에 시간이 날 때마다 행차하여 통일신라 백성들의 화합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감은사를 완성하기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싸움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날마다 통일된 나라의 백성들이 화합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신문왕의 일과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박숙청이라는 신하가 신문왕에게 급히 고할 것이 있다며 들어왔다. "폐하, 동해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일렁이고 있사옵니다."
이에 놀란 신문왕은 서둘러 대왕암근처로 달려갔다. 과연 박숙청이 고한대로 작은 산이 두둥실 떠서 물결에 일렁이고 있는데 작은 산에는 대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살피고 있는데 더 놀라운 일은 갑자기 산이 둘로 갈라지며 대나무 역시 둘로 쫘악 갈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신문왕은 용한 주술사인 김춘질을 불러 점을 치도록 명령했다. 김춘질의 점괘는 다음과 같았다.
"폐하, 돌아가신 문무대왕께서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잘 지켜주시고 계시옵니다. 돌아가신 김유신 장군님께서도 문무대왕님 곁에서 신라를 돌보아주고 계시옵니다. 그러나 늘 신라에 대해 노심초사 걱정하고 계시는 폐하의 걱정을 잘 아시는지라 곧 이곳으로 선물 하나를 가지고 오실 것이라 하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정성껏 기도를 올리면 되겠사옵니다."
김춘질의 점괘를 들은 신문왕은 비로소 안심하며 그날 밤은 감은사에서 머무르기로 하였다. 마음이 심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무렵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신문왕은 벌떡 일어나 바닷가로 달려 나갔다. 깜깜한 바다 저 너머로 둘로 갈라졌던 산이 서서히 달빛을 바다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산은 신비로운 기운을 품은 채 다시 하나가 되었다. 신문왕은 이에 배를 띄워 산 가까이로 다가가 보았다. 갑자기 커다란 파도가 일렁이더니 용 한마리가 나타나 가까이 다가와 용은 공손하게 절을 하며 신문왕에게 나아갔다.
"저는 문무대왕님의 심부름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문무대왕님은 폐하께서 감은사를 지으시고 항상 기도를 올림에 크게 기뻐하십니다."
용은 먼저 옥으로 된 띠를 내밀으며,
"이 옥대는 문무대왕님과 김유신 장군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항상 이 옥대를 차고 계시옵소서. 항상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오... 고맙구나."
"폐하의 요즘 근심은 무엇이 옵니까."
"문무대왕께서 삼국을 통일하셨지만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근심이구나."
용은 대나무를 가리키며,
"폐하께서 보셨듯이 저 대나무는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이 되면 서로 합칩니다. 저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부신다면 백성들은 다시 힘을 합칠 것입니다. 대나무는 많은 역경과 어려움도 극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용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다로 사라졌다. 신문왕은 얼른 용이 시키는 대로 해가 뜨기 전에 대나무를 잘라 배에 싣고 돌아왔다. 대궐로 돌아온 신문왕은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게 하였다. 마침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는데 만들어진 대나무피리를 부니 놀랍게도 바람이 잔잔해지고 빛이 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질병이 물러갔으며 다투고 화합하지 못했던 백성들도 마음을 합치게 되었다. 신문왕은 신기한 피리에 감복하여 '모든 파도를 가라앉게 만드는 피리'라는 뜻으로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만파식적은 실제 조선 숙종 때 삼국유사가 기록한 시기와 일치하는 옥피리의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만파식적 - 한국관광공사)

 
지금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피리입니다. 
 
 
# 에필로그 
 
뜻깊은 2박 3일의 경주, 울산 여행
 
하루도 여유롭게 여행을 다니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보지 못한 곳, 가 보았어도 그곳에 대해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을 이번 여행을 통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비용은 사실 만만치 않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택시를 제외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아마도 며칠이 더 걸렸거나 비용이 더 많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와같은 여행계획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라면 대중교통 이용은 힘들다고 얘기드릴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경험을 다른 여행 스토리에서 부연 설명 드리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건, 이번 여행에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큰 나라사랑을 실천하고 있으셨는지 가슴깊이 깨달았으며, 이제는 우리도 정신 차리고 나라를 제대로 세위야겠다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터넷 자료도 찾고, 부연설명도 하느라 새벽 1시가 넘어갑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에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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